
7월 30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234회에서는 태풍 루사가 강릉을 덮친 밤 병사들을 먼저 대피시키고 노부부를 구하려다 숨진 김영곤 대위의 희생이 공개됐다.
300명 하객이 30명으로 줄어든 결혼식
이날 이야기는 결혼식 당일까지 신랑의 생사를 알지 못했던 한 신부의 사연으로 시작됐다. 신랑은 식이 시작되기 직전 온몸이 젖은 상태로 극적으로 식장에 도착했다.
시부모도 4시간 넘게 산길과 개울을 건넌 끝에 결혼식장에 닿았다. 태풍 루사로 길이 끊기면서 300명이 참석할 예정이던 결혼식에는 단 30명의 하객만 자리를 지켰다.
김정민은 “기쁘고 행복해야 할 순간이 너무 조촐해졌다”라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한 부부가 가장 행복해야 할 날은 기록적인 폭우를 피해 가까스로 가족이 모인 날로 남았다.
하루 870.5㎜ 폭우에 멈춰버린 강릉
태풍 루사가 상륙한 강릉에는 기상 관측 122년 역사상 가장 많은 비가 내렸다. 하루 강수량은 870.5㎜로 국내 1일 강수량 역대 최고치였고, 평년 장마철에 내리는 전체 비의 약 세 배에 달했다.
김정민은 1984년 서울 대홍수 당시 연립주택 2층 현관까지 물이 차올랐던 기억을 꺼냈다. 그는 “공포스럽고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며 강릉 주민들이 느꼈을 두려움에 공감했다.
박정화도 3~4년 전 강남 홍수 때 자동차 안으로 물이 들어왔던 경험을 떠올렸다. 그는 “그 정도도 완전 패닉이었는데 그때의 강릉은 몇 백배의 모습이지 않나. 너무 무서웠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루사는 사망자 238명과 실종자 8명을 남겼고 재산 피해는 5조 원에 달했다. 도로와 주택, 농경지가 물에 잠기면서 강릉의 일상은 하루 만에 무너졌다.
범람까지 80㎝ 남았던 오봉댐
도시 전체가 마비된 상황에서 저수량 1,400만 톤 규모의 오봉댐에도 붕괴 위기가 닥쳤다. 정전으로 수문이 움직이지 않았고 만수위까지 남은 높이는 1.4m에 불과했다.
빗물은 계속 차올라 범람까지 단 80㎝만 남은 비상 상황으로 이어졌다. 현장 공무원들은 주민을 대피시키기 위해 뛰었고 대책 본부에서는 밤새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한 조치가 이어졌다.
자정을 넘긴 뒤 비가 잦아들면서 오봉댐 범람이라는 더 큰 참사는 피할 수 있었다. 같은 시각 아마추어 무선 기사 김진호는 조난 신호인 메이데이를 접수해 수재민 구조와 주민 대피를 도왔다.
네 번째 생일에 가족 잃은 아버지
하지만 비가 약해진 뒤에도 이미 벌어진 비극은 되돌릴 수 없었다. 염규태에게 태풍이 닥친 그날은 막내딸 은희의 네 번째 생일이었다.
염규태는 불어난 물속에서 아내와 두 딸을 지키려고 했지만 가족 모두가 급류에 휩쓸렸다. 홀로 구조된 그는 다음 날 아내의 시신을 마주해야 했다.
수십 일이 지난 뒤에는 두 딸의 시신까지 직접 찾아야 했다. 막내딸의 생일로 기억됐어야 할 날은 아내와 두 자녀를 모두 잃은 날로 바뀌었다.
노부부 구하러 물살에 뛰어든 중대장
구조 과정에서는 강릉 철벽부대 중대장이었던 김영곤 대위의 희생도 전해졌다. 김영곤은 위험이 커지자 자신이 지휘하던 병사들을 먼저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다.
이후 고립된 노부부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물살 속으로 뛰어들었다. 노부부는 무사히 구조됐지만 김영곤은 급류에 휩쓸렸고 실종 나흘 만에 숨진 채 발견됐다.
영결식 현장에는 어린 외동딸도 자리했다. 당시 네 살이었던 딸의 모습을 본 리스너들은 말을 잇지 못한 채 눈물을 흘렸다.
산다라박은 “마음이 무너질 것 같다”라고 말했다. 김정민도 “남은 사람들의 마음을 상상을 못할 것 같다. 어떤 말로도 표현이 안 될 것 같다”며 “정말 가슴 아프다”라고 전했다.
24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은 그날
루사로 삶의 터전을 잃은 수재민은 2만3,000여 명에 달했다. 강릉에서만 실종자 5명과 사망자 48명이 발생했고 살아남은 이들은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산다라박은 “남은 사람들은 가족을 잃은 그 슬픔과 죄책감 때문에 평생 괴로울 것 같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재난이 멈춘 뒤에도 생존자들의 시간은 그날에 머물러 있었다.
피해자들의 아픔을 고려해 태풍 ‘루사’라는 이름은 다시 사용되지 않도록 영구 제명됐다. 24년이 흐르며 참사의 기억은 희미해지고 있지만 박정화는 “잊으면 안 된다.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애쓰신 많은 분들의 이야기를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방송 뒤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태풍 루사 때문에 강릉이 사라질 뻔했다는 얘기를 들으니까 소름 돋음”, “루사와 매미 같은 태풍이 올까 봐 무서워”라는 반응이 이어졌다. “루사 때 건물 유리창 깨지는 거 봤는데 잊을 수가 없음”, “태풍 하나가 이렇게 큰 피해를 주었단 게 슬프고 안타까워”, “가족을 잃은 분들의 이야기 보면서 마음 아파서 울었음”이라는 글도 올라왔다.
병사와 노부부의 생명을 먼저 생각한 김영곤의 선택은 재난 속에서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움직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남겼다. 24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날의 희생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사진 : S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