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 시간여행자 36회 허균과 일곱 명의 홍길동

역사스페셜 시간여행자 36회 허균과 일곱 명의 홍길동

1613년, 문경새재에서 거액의 은 상인 강도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수사 끝에 밝혀진 범인들의 정체는 놀랍게도 조선 최고위층 관료들의 자제들. 남부러울 것 없는 명문 사대부가의 아들들이 왜 이런 범죄를 저질렀을까?

그리고 그 강도들 곁에는 당대 최고의 천재 문인이자 고전 소설 『홍길동전』의 저자로도 추정되는 허균이 있었다. 도대체 그는 문경새재의 강도단과 어떤 인연이었을까? 시간여행자 지승현과 함께 그 이면에 감춰진 진실을 추적해 본다.

9월 6일에 방송되는 KBS1 ‘역사스페셜 시간여행자’ 36회 ‘조선의 신분제 1부 – 허균과 일곱 명의 홍길동’ 편에서는 신분 차별에 가로막힌 강변칠우와 이들의 곁에 있었던 허균이 어떤 세상을 꿈꿨는지 공개된다.

차별에 가로막히자 강도가 된 명문가 청년들

차별에 가로막히자 강도가 된 명문가 청년들
차별에 가로막히자 강도가 된 명문가 청년들

문경새재 강도 사건의 주동자들은 이른바 ‘강변칠우’라 불리던 고위 관료의 아들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서얼’이라는 신분적 한계가 있었다. 서얼이란 ‘서자’와 ‘얼자’를 합쳐 부르는 말로, 아버지가 양반이나 어머니가 양인 첩인 경우 ‘서자’, 천인 첩이면 ‘얼자’라고 한다.

태어난 집안만 보면 이들은 조선 사회의 상층부에 가까웠다. 아버지들은 영의정과 목사, 관찰사와 병사 등을 지낸 고위 관료들이었지만, 어머니의 신분이 정실부인이 아니었다는 이유만으로 아들들의 앞에는 다른 길이 놓였다.

서얼은 법과 제도에 의해 대대손손 문과에 응시할 수 없으며, 관직에 오르더라도 품계에 한계가 있었다. 강변칠우는 서얼 차별을 철폐해 달라는 상소마저 조정으로부터 외면당하자, 관직에 나가지 않고 여주 남한강 변에 은거한다. 이들은 스스로 중국의 ‘죽림칠현’을 본따 ‘강변칠우’라 불렀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1608년 서얼에게도 벼슬길을 열어 달라며 연명 상소를 올렸다. 문벌과 적서의 구분이 능력보다 앞서는 현실에서 자신들에게도 관직 진출의 기회를 달라는 요구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신분의 벽은 개인의 출세만 막은 것이 아니었다. 양반 가문에 태어났더라도 서얼이라는 이유로 과거와 관직에서 제한을 받았고, 자신의 재능을 국가에 쓸 통로도 좁았다. 강변칠우가 품은 불만은 이런 제도적 차별과 맞닿아 있었다.

여주 강변에서 이들은 시와 술을 나누며 세상과 거리를 두었다. 중국 위진 시대의 죽림칠현을 본떠 자신들을 일곱 벗으로 부른 선택에는 조정의 질서 밖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겠다는 뜻도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은거는 끝내 범죄로 이어졌다. 문경새재에서 은을 운반하던 상인을 노린 강도 살인 사건이 벌어졌고, 거액의 은이 빼앗겼다. 명문가의 자제라는 출신과 강도단이라는 정체가 한 사건 안에서 겹치며 조정은 크게 흔들렸다.

강변칠우가 왜 여기까지 내몰렸는지를 따라가면 범죄 자체와 함께 그 배경에 있던 신분제의 모순도 드러난다. 차별을 없애 달라는 요구가 막힌 뒤 이들의 선택은 점점 사회의 질서에서 멀어졌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사건으로 이어졌다.

명문가 적자 허균, 천한 이들의 벗이 되다

명문가 적자 허균, 천한 이들의 벗이 되다

강변칠우의 곁에는 허균이 있었다. 조선 최고의 명문가로 꼽히는 양천 허씨 가문의 적자였던 허균. 그는 지방 수령으로 부임하면 서얼 친구들을 불러 모아 식객으로 대접하곤 했다. 이는 당시 성리학적 질서에서 이해받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허균은 자신이 직접 서얼 차별을 받는 처지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신분 때문에 재능을 펼치지 못하는 사람들과 가까이 지냈고, 그의 인간관계는 양반 적자 중심의 질서에서 자주 비판의 대상이 됐다.

허균에게 시를 가르친 손곡 이달 역시 서얼이었다. 뛰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출신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온전히 펼치기 어려웠던 스승의 삶은 허균이 신분과 재능의 문제를 바라보는 데 중요한 경험으로 남았다.

“삼척부사 허균은 유가의 아들임에도 (…)
불교를 숭신하며 수령이 되었을 때도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승려들을 먹이면서도 부끄러워할 줄을 몰랐으니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 『선조실록』 40년 5월 4일

실록의 비판은 허균이 당시 사회에서 얼마나 낯선 행보를 보였는지를 보여준다. 유학자 집안의 아들이 불교를 가까이하고 승려들과 거리낌 없이 어울린 행동은 단순한 개인 취향을 넘어 성리학적 규범을 어겼다는 공격으로 이어졌다.

허균이 어울렸던 대상은 서얼이나 승려뿐만이 아니었다. 허균은 부안의 기생 이매창과 신분·성별을 뛰어넘는 우정을 나누었는데, 특히 매창의 시를 매우 흠모했다. 매창이 죽자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며 이를 글로 남기기도 했다. 이렇듯 허균의 우정은 늘 신분적으로 낮은 이들과 격의 없이 이어졌다.

매창은 시로 이름을 남긴 인물이었고, 허균은 그의 문학적 재능을 신분보다 먼저 보았다. 기생이라는 사회적 위치보다 시를 짓는 사람으로서 매창을 대했다는 점에서도 허균의 교유 방식은 당시의 엄격한 신분 질서와 거리가 있었다.

서얼과 승려, 기생을 대하는 태도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허균은 사람의 가치를 태어난 신분이나 성별만으로 판단하지 않았고, 재능과 생각을 나눌 수 있다면 벗이 될 수 있다는 태도를 실제 인간관계에서 보였다.

그런 허균이 강변칠우와 가까웠다는 사실은 우연한 인연만으로 보기 어렵다. 조정의 제도 안에서 막혀 있던 서얼 청년들과 양반 적자이면서도 제도 밖의 사람들과 어울린 허균 사이에는 신분이 재능을 막아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이 이어져 있었다.

홍길동이 꿈꾼 세상, 허균이 그린 이상

홍길동이 꿈꾼 세상, 허균이 그린 이상
홍길동이 꿈꾼 세상, 허균이 그린 이상

서얼 태생의 한계에 분노하며 이상향을 찾아 떠난 소설 속 영웅 홍길동. 허균이 집필한 것으로 알려진 『홍길동전』에는 능력 위주의 새로운 세상을 갈망했던 그의 혁명적 사상이 엿보인다.

『홍길동전』의 작자를 허균으로 보는 견해는 오래 이어져 왔지만, 현전 자료를 둘러싸고 작자 문제에 대한 논의도 계속돼 왔다. 그래서 허균을 저자로 단정하기보다 저자로 전해지거나 추정된다는 표현이 함께 사용된다.

작품 속 홍길동은 서얼이라는 출생 때문에 집안과 사회에서 제약을 받는다. 뛰어난 능력이 있어도 태어난 신분이 앞길을 가로막는다는 설정은 강변칠우가 현실에서 맞닥뜨린 문제와 겹쳐 보이는 대목이다.

홍길동은 주어진 차별을 받아들이는 데 머물지 않고 기존 질서 밖으로 나간다. 끝내 새로운 공간에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 길을 찾는 흐름은 신분보다 능력을 앞세우는 세상에 대한 상상으로 읽힌다.

허균은 자신의 문집인 『성소부부고』를 통해 시대를 향한 날카로운 일침을 남겼다. 「유재론」(버려진 인재에 대해 논함)에서는 신분적 한계에 갇혀 훌륭한 인재들이 무참히 버려지는 현실을 탄식했다.

「유재론」에서 중요한 기준은 사람이 어느 집안에서 태어났느냐가 아니라 실제 어떤 재능을 지녔느냐다. 국가가 문벌과 출신 때문에 쓸 수 있는 인재를 스스로 버린다면 결국 나라에도 손해가 된다는 문제의식이 글의 바탕에 놓여 있다.

「호민론」에서는 백성을 세 가지로 분류했는데, 이 중 억눌린 백성들을 ‘호민’으로 지칭하며 이들은 세상을 뒤엎을 수 있다고 강력하게 경고했다. 또한, 『성소부부고』에는 「손곡산인전」을 비롯한 여러 소설이 담겼는데, 시대적 한계로 쓰이지 못한 인재들을 주인공으로 했다.

허균이 나눈 백성의 세 부류는 현실에 순응하는 항민, 불만을 품고도 행동하지 못하는 원민, 기회를 만나면 기존 질서를 움직일 수 있는 호민으로 설명된다. 그가 가장 경계해야 한다고 본 존재는 억눌림을 행동으로 바꿀 수 있는 호민이었다.

「손곡산인전」의 주인공 이달도 출신 때문에 재능을 제대로 쓰지 못한 인물이었고, 허균은 자신의 스승이기도 했던 이달의 뛰어난 시재와 불우한 삶을 기록하며 문벌과 신분이 사람의 가능성을 결정하는 현실을 비판했다.

따라서 허균의 문학과 논설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 『홍길동전』에 나타난 신분의 벽, 「유재론」의 인재 등용 문제, 「호민론」의 백성에 대한 경고, 「손곡산인전」의 불우한 재능이 모두 다른 방식으로 같은 시대의 모순을 바라본다.

피바람 속 스러져간 허균과 서얼 친구들

피바람 속 스러져간 허균과 서얼 친구들
피바람 속 스러져간 허균과 서얼 친구들

허균과 강변칠우가 살던 시대의 정국은 안정적이지 않았다. 당시 왕은 조선 왕조 첫 번째 서자 출신 왕인 광해군으로, 왕위에 오르기 직전까지 자기보다 31살 어린 적자 영창대군과 왕위를 두고 경쟁했다.

광해군 즉위 뒤에도 영창대군의 존재는 정치적 긴장과 연결돼 있었다. 왕위를 둘러싼 갈등은 한 개인의 범죄 사건도 정파 간 권력 투쟁으로 확대될 수 있을 만큼 민감한 배경을 만들었다.

강변칠우는 문경새재 강도살인 사건으로 덜미가 잡히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단순한 사건이 당시 불안했던 정국과 얽히면서, 반대파를 숙청하기 위한 역모 사건, ‘계축옥사‘로 비화된 것이다. 광해군이 친국한 이 옥사에서 강변칠우는 모진 고문에 강제로 역모를 실토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옥사에서는 영창대군을 옹립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려고 범행을 저질렀다는 역모 진술이 등장했다. 이 진술은 강도 사건의 범위를 왕위 계승 문제와 반대파 숙청으로 넓혔고, 영창대군과 그 주변 세력까지 거대한 정치적 소용돌이에 끌어들였다.

계축옥사는 결국 영창대군과 외조부 김제남을 비롯한 여러 인물의 운명을 바꾸는 사건으로 번졌다. 강변칠우의 범죄가 출발점이었지만 사건은 대북파가 반대 세력을 제거하는 정치적 옥사로 확대됐고, 조정의 권력 구도까지 뒤흔들었다.

이 끔찍한 피바람 속에서 살아남은 허균. 그는 이후 폐모론을 주장하는 등 중앙 정계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달라진 행보를 보이며 형조판서까지 승승장구한다. 그러나 그의 출세는 도성 남대문에 나붙은 흉서 사건의 원흉으로 지목되며 끝을 맺는다. 허균이 꾸몄다는 이 역모 사건의 진상은 무엇인가?

강변칠우와의 교유로 위험한 위치에 놓였던 허균은 이후 대북 정권과 가까워지며 정치적 생존을 이어갔다. 1616년에는 형조판서에 올랐고 더 높은 관직으로 나아갔지만, 그가 비판했던 질서 안에서 권력을 잡는 모순적인 행보도 함께 남겼다.

1618년 허균은 역모 혐의로 다시 권력 투쟁의 중심에 섰다. 도성에 나붙은 흉서와 여러 의혹이 그에게 향하면서 정치적 생명은 끝났고, 허균 역시 자신이 교유했던 서얼 친구들처럼 형장의 죽음을 맞게 된다.

신분의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꾼 강변칠우와 허균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불씨는 이후에도 꺼지지 않았다. 서얼에 대한 차별 철폐 요구는 조선 후기 내내 수많은 연명 상소와 궐문 시위로 이어졌다. 시대의 이단아 허균과 서얼 청년들이 꿈꿨던 새로운 세상은 무엇일까?

서얼들의 집단 행동은 한 세대에서 끝나지 않았다. 숙종과 영조 때에도 많은 서얼이 이름을 함께 올린 상소를 통해 차별을 없애 달라고 요구했고, 관직 진출의 문을 넓히려는 서얼허통 운동은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다.

정조 때에는 변화가 더 구체화됐다. 1777년 정유절목을 통해 서얼이 진출할 수 있는 관직 범위가 넓어졌고, 1779년에는 규장각 검서관에 학식 있는 서얼들이 등용되면서 능력을 기준으로 사람을 쓰려는 시도가 실제 제도로 이어졌다.

강변칠우의 범죄가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이들이 부딪힌 차별의 문제는 사건과 함께 사라지지 않았다. 허균이 글로 제기한 인재 등용의 문제 역시 오랜 시간이 지나 제도의 변화로 이어지며 조선 사회가 신분과 능력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계속 묻게 했다.

강변칠우의 상소와 허균의 글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신분이 사람의 가능성을 막는 현실을 드러냈고, 그 질문은 조선 후기 서얼허통 운동까지 이어졌다. 그들이 목숨과 글로 남긴 질문은 조선의 신분 질서를 어디까지 흔들었을까?

허균과 강변칠우가 신분 차별에 맞서며 남긴 문제의식과 그들이 꿈꾼 새로운 세상은 9월 6일 일요일 오후 9시 30분에 방송되는 KBS1 ‘역사스페셜 시간여행자’ 36회 ‘조선의 신분제 1부 – 허균과 일곱 명의 홍길동’ 편에서 공개된다.

사진 : KBS 1TV ‘역사스페셜-시간여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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