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5일에 방송되는 KBS1 ‘다큐온’ 371회에서는 세계보건기구 제6대 사무총장을 지낸 故 이종욱 박사의 서거 20주기를 맞아, 그가 남긴 ‘행동하는 사람(Man of Action)’의 정신이 제네바의 감염병 대응 시스템과 라오스·가나의 보건 현장, 그리고 이종욱 펠로우십을 통해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공개된다.
“올바른 장소에서, 올바른 일을, 올바른 방식으로 하라”

2006년 5월 세계보건총회 개막을 불과 사흘 앞둔 시점, 전 세계 보건의료의 수장이던 이종욱 박사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사무실에서 보고서만 읽기보다 “현장에 답이 있다”는 믿음으로 한 해에 지구 7바퀴 반을 도는 강행군을 하며 질병과 가난이 있는 곳을 직접 찾아 사람을 만나고 해법을 찾았던 그는 WHO 안팎에서 ‘행동하는 사람’으로 불렸다.
그가 WHO에서 일한 시간은 약 23년에 이른다. 한센병과 결핵, 소아마비, 에이즈 등 당시 국제 보건이 맞닥뜨린 문제의 현장을 누볐고, 사무총장 재임 기간에는 치료 접근성과 감염병 대응 체계를 실제로 움직이는 데 힘을 쏟았다. 그의 리더십은 말보다 실행을 앞세운다는 점에서 분명한 색깔을 남겼다.
대표적인 사례가 에이즈 치료제 접근성을 넓히기 위해 내놓은 ‘3 by 5’ 구상이다. 치료가 필요하지만 약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를 확대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고, WHO 최초의 국제조약인 담배규제기본협약(FCTC)과 국제보건규칙 개정 같은 제도적 변화에도 힘을 실었다. 생전에 내린 결정들은 이후 국제 보건이 위기에 대응하는 기반으로 이어졌다.
서거 20년이 지난 지금 ‘다큐온’은 그의 생애를 단순히 과거의 업적으로 정리하지 않는다. 이종욱 박사가 세계 곳곳의 오지와 감염병 최전선에 뿌렸던 변화가 현재 어떤 시스템과 사람을 통해 살아 움직이는지를 따라가며, 한 사람의 철학이 제도와 교육, 의료 현장에 남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제네바의 추모와 살아있는 시스템: JW Lee SHOC Room

2026년 5월 스위스 제네바 WHO 본부에는 이종욱 박사의 서거 20주기를 기리는 세계 보건 관계자들이 모였다.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과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게브레예수스 WHO 사무총장, 빌게이츠재단과 세계백신면역연합을 비롯한 글로벌 보건기구 관계자들이 참석해 그가 남긴 보건 형평성의 의미를 되짚었다. 추모행사에는 한국과 중국, 에티오피아, 라오스, 스리랑카, 탄자니아 등 6개국 보건부도 공동으로 참여해 한 사람의 유산을 국제 보건의 공동 과제로 다시 바라봤다.
집행이사회 회의실에서는 세계 각국 대표들의 추모 발언과 이종욱 박사의 생전 모습이 담긴 영상이 이어졌다. 참석자들은 가장 가난하고 취약한 사람에게 보건의료가 먼저 닿아야 한다고 믿었던 그의 삶을 돌아봤고, 짧은 재임 기간에도 국제 보건에 남긴 구체적인 성취가 지금도 기반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되새겼다.
회의실 밖 복도에서는 그의 보건의료 인생을 돌아보는 특별 사진전도 열렸다. 1970년대 경기도 성라자로 마을에서의 한센병 봉사를 시작으로 WHO 피지 사무소 시절, 에이즈 치료제 보급을 확대하려 한 ‘3 by 5’, WHO 최초의 국제조약인 담배규제기본협약까지 서로 다른 시기의 장면이 한 공간에 이어졌다.
추모의 중심에는 WHO의 비상상황실인 SHOC 룸이 있었다. 이종욱 박사는 2003년 사스 사태 당시 “다음 위기는 반드시 온다, 지금 대비해야 한다”는 판단 아래 WHO가 새로운 감염병 위기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도록 최초의 전략보건운영센터를 만드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2026년 이 공간은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거쳐 이종욱 박사의 이름을 단 전략상황실로 다시 문을 열었다.
이곳은 이름만 남긴 추모 공간이 아니다. 세계 각지에서 발생하는 감염병 정보와 위기 상황을 실시간으로 공유하고 대응을 조정하며 빠른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WHO의 보건 사령탑으로 기능한다. 사스의 경험에서 출발한 대비가 코로나19 팬데믹을 지나 또 다른 바이러스 위협에 대응하는 현재의 시스템으로 남은 셈이다.
‘다큐온’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이종욱 박사의 유산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보여준다. 한 사람을 기리는 명패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만든 시스템이 지금도 실제 사람들의 생명을 지키는 일에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라오스: 헌신의 기억에서 모자보건 자립의 땅으로

제네바에서 이어진 이야기는 라오스 시엥쿠앙의 깊은 산악 지역으로 이동한다. 의료시설에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오지에서는 보건소 의료진이 직접 마을을 찾아가는 모자보건 순회진료가 이어지고 있다. 비가 오면 다른 지역과 이어진 길이 끊길 정도로 접근이 어려운 곳에서 의료진이 산모를 찾아가는 방식은 진료 접근성을 바꾸는 중요한 수단이 됐다.
출산을 앞둔 산모들은 산전 진료를 받고 임신 중 필요한 영양과 건강 정보를 전달받는다. 임산부 영양제와 철분, 엽산 등을 받기 위해 아웃리치를 기다리는 산모들도 있으며, 과거에는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어떤 위험을 살펴야 하는지 알기 어려웠던 주민들에게 정기적인 순회진료가 의료진과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되고 있다.
시엥쿠앙 지역의 모자보건 사업은 보건시설과 장비만 늘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의료인력을 교육하고 지역 보건서비스의 운영 능력을 높이며, 보건소를 찾기 어려운 주민에게 직접 서비스를 전달하는 방식까지 함께 강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일회성 진료보다 지역이 스스로 산모와 아이를 돌볼 수 있는 체계를 만드는 과정이다.
공립병원에 한국의 지원으로 도입된 초음파 장비도 변화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장비가 없던 때에는 의사가 촉진과 문진만으로 산모의 상태를 짐작해야 했고, 문제가 겉으로 나타나기 전에는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초음파를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눈으로 드러나지 않는 이상과 고위험 임신의 징후를 더 일찍 살피고 필요한 치료를 준비할 수 있는 여지가 넓어졌다.
‘다큐온’은 의료장비 한 대의 도입보다 그 장비를 다룰 사람과 환자를 연결하는 시스템에 주목한다. 오지의 산모를 찾아가는 의료진, 진료를 기다리는 주민, 지역 병원에서 장비를 사용하는 의료인이 하나의 보건 체계로 연결될 때 지원이 실제 생명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적절한 검진을 받지 못해 출산 중 산모와 아기를 잃는 일이 반복됐던 지역은 이제 위험을 미리 발견하고 대응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임신과 출산이 생명을 걸어야 하는 과정이었던 곳에서 이종욱 박사가 강조했던 현장 중심의 보건 철학이 모자보건 자립이라는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가나: 다시 걸음을 내딛는 사람들, 국립 의지·보조기센터의 변화

다음 현장은 가나의 재활의료다. 선천적 장애나 사고, 당뇨병으로 손과 발을 절단한 사람에게 의지와 보조기는 단순한 의료기구가 아니다. 혼자 이동할 수 있는지, 학교나 일터로 돌아갈 수 있는지, 지역사회 안에서 자신의 생활을 다시 이어갈 수 있는지를 좌우하며 적절한 보조기기의 부재는 사회적 고립과 삶의 단절로 이어질 수 있다.
가나 수도 아크라의 국립 의지·보조기센터에는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의 지원으로 제작환경을 개선하고 현지 제작기사의 역량을 높이는 사업이 이어져 왔다. 첨단 제작장비와 작업환경을 갖추는 것과 함께 현지 기사가 직접 측정하고 설계하며 몸에 맞는 보조기기를 만들 수 있도록 기술교육과 유지관리도 중요하게 다뤄졌다.
센터 작업실에서는 장애인의 신체 상태와 움직임을 세밀하게 살핀 뒤 맞춤형 의지와 보조기를 만든다. 같은 크기의 제품을 일괄적으로 제공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람마다 다른 몸과 생활에 맞춰 여러 차례 조정해야 하기 때문에 제작자의 경험과 기술이 결과를 좌우한다.
방송에는 평생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이동하기 어려웠던 장애 아동이 자신에게 맞는 보조기를 착용하고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힘으로 땅을 딛고 일어서는 순간도 담긴다. 처음 내딛는 걸음은 위태롭지만 한 걸음, 또 한 걸음 스스로 세상을 향해 움직이면서 치료의 의미가 새로운 생활의 시작으로 넓어진다.
현재 가나에서는 장애아동 재활서비스의 접근성과 품질을 높이기 위한 사업도 이어지고 있다. 의지·보조기센터의 운영체계를 보완하고 제작환경과 인력 역량을 강화하면서, 장비 지원만 남기지 않고 현지에서 계속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방향이다.
이 변화는 이종욱 박사가 중요하게 여겼던 ‘현장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보건’과 맞닿는다. 필요한 사람에게 기구 하나를 전달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환자에게도 같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사람과 기술, 시스템을 남기는 것이 더 긴 유산이 된다.
국경을 넘어 이어지는 생명의 교실: 이종욱 펠로우십

마지막 이야기는 한국의 대학병원으로 이어진다. 라오스에서 온 의사와 간호사들은 이른 아침 회진부터 수술실과 병동을 오가며 한국 의료진의 기술과 시스템을 익힌다. 이들은 개발도상국 보건의료인력을 초청해 전문 교육을 제공하는 ‘이종욱 펠로우십 프로그램’의 참가자들이다.
이종욱 펠로우십은 故 이종욱 박사의 “물고기를 건네주는 것보다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현장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2007년 시작됐다. 개발도상국의 의사와 간호사, 보건행정가, 의공기사 등에게 전문 교육을 제공해 귀국 뒤 자국의 보건의료체계를 스스로 운영하고 발전시키는 ‘의료 자립’을 이루도록 돕는 것이 핵심이다.
2025년까지 36개국 1,894명의 보건의료인력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2026년에도 9개 연수과정에 18개국 179명이 참여하며 임상과 보건정책, 감염병 대응, 의공 등 여러 분야의 교육을 이어가고 있다. 단순한 기술 전수에 머무르지 않고 각 나라에서 지속 가능한 보건의료체계를 움직일 사람을 키우는 방식이다.
라오스 의료진에게 한국에서의 연수는 고국에서 경험했던 한계를 다시 바라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첨단 의료장비와 선진 진단기술이 부족해 고위험 산모나 암 환자를 조기에 발견하지 못하고 놓쳐야 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새로 익힌 진단법과 수술 시스템을 고국 환자에게 적용할 방법을 배운다.
일산 백병원의 수술실과 병동에서 이어지는 교육은 결국 다시 라오스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다. “한국에서 배운 이 기술과 시스템을 그대로 들고 돌아가, 고국의 환자들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을 전하고 싶습니다”라는 연수생의 말처럼 배움의 목적지는 한국이 아니라 자신의 나라다.
물자를 보내면 언젠가 소모되지만 사람에게 기술을 남기면 그 사람이 다시 다른 의료진과 환자를 바꿀 수 있다. 이종욱 박사가 평생 강조했던 현장 중심의 보건과 인재 양성의 철학은 펠로우십 참가자들이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면서 여러 갈래로 확장된다.
20년 전 이종욱 박사의 삶은 멈췄지만 제네바의 전략상황실은 감염병 정보를 살피고, 라오스 의료진은 산모를 찾아 산길을 오르며, 가나의 제작기사는 장애인의 몸에 맞는 보조기를 만든다. 한국에서 의료기술을 익힌 연수생도 다시 고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면서 한 사람의 이름은 서로 다른 현장의 행동으로 이어진다.
기념관에 이름을 남기는 것보다 그가 만들고자 했던 시스템이 다른 사람의 손에서 계속 움직이는 것이 이종욱 박사의 철학에 더 가까운 유산일 수 있다. 이종욱 박사가 남긴 가장 오래가는 유산은 결국 누군가 대신 행동할 사람을 계속 만들어내는 일 아닐까?
제네바의 ‘JW Lee’ 전략상황실부터 라오스 모자보건과 가나 재활의료, 이종욱 펠로우십으로 이어지는 ‘행동하는 사람’의 유산은 8월 15일 토요일 오후 10시 20분에 방송되는 KBS1 ‘다큐온’ 371회에서 공개된다.
사진 : KBS 1TV ‘다큐 On’